6월 7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1. 1654년 : 절대왕정으로 프랑스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프랑스 왕으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2. 1893년 : 간디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기차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Louis XIV : 1638-1715)
루이 14세의 생애와 업적
- 루이 14세는 1638년 9월 5일, 프랑스의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나서 1643년 5월 14일, 4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 1654년 6월 7일에 프랑스 북부의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그 후 그의 통치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72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 루이 14세는 "태양왕"으로 불리며 절대왕정을 확립하였고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이 말은 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확장 개조하였습니다. 이 궁전은 프랑스 문화와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로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의 중심지 기능을 하는 동시에 귀족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문화와 예술의 후원
- 루이 14세는 예술과 문화를 적극 후원하여 프랑스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예술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많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후원 덕분에 많은 예술가, 작가, 음악가들이 활동하였고 프랑스 예술과 문화가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군사와 외교
- 루이 14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그의 많은 전쟁은 결국 프랑스를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1678), 오스만-베네딕트 전쟁 (1683-1699), 스페인-프랑스 전쟁 (1701-1714)등이 대표적이며 또한 많은 유능한 장군들을 발굴하여 신속하고 강력한 공격에 초점을 맞춘 전략으로 군사적 성과를 이루어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루이 14세는 포대와 시설을 개선하여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으며 군사 기술의 혁신을 촉진시키는데 힘썼습니다.
- 루이 14세는 외교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종교 정책
- 루이 14세는 가톨릭 신앙을 강화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 1685년에 낭트 칙령을 철회하여 위그노(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를 박해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내 종교적 통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많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게 되어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통치와 유산
-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 통치는 프랑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으며 이 때가 프랑스 역사의 전성기로 여겨집니다.
- 1715년 9월 1일 사망하기까지 72년이라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랜 왕위 재임 기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 1869년 10월 2일~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인도의 독립 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자 비폭력 저항 운동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주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입니다.
- 간디는 1888년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런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891년에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 피테르마르츠버(Pietermaritzburg) 사건 : 1893년 6월 7일 간디는 기차에서 인종 차별로 인해 강제로 쫓겨난 사건을 겪었으며 이 사건은 간디의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21년 동안 머무르며 인도인 공동체의 권리와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이끌었으며 비폭력 저항 운동(Satyagraha)을 통해 인권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 1915년 간디는 인도로 돌아와 인도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테르마르츠버(Pietermaritzburg) 사건
- 간디는 인도 출신의 변호사로 1893년 당시 남아프리카에서 법률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 1893년 6월 7일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색 인종으로서는 드물게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의 1등석 표를 구입하였는데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인종 차별이 극심했습니다.
- 기차가 피테르마르츠버(Pietermaritzburg)에 도착했을 때 한 백인 승객이 간디가 1등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기차 직원에게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 기차 직원은 간디에게 3등석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으나 간디는 1등석 표를 가지고 있다며 이를 거부했고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는데 이 행동이 첫 번째 비무장 저항(Satyagraha) 행동이라고 알려졌습니다.
- 그는 당시 24세였으며 이 비무장 저항은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만 탑승할 수 있는 첫 번째 1등석 칸에서 나가라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 결국 간디는 기차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피테르마르츠버역의 대합실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 이 사건은 간디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인종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인도와 남아프리카의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간디는 이후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공동체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비폭력 저항 운동(Satyagraha)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비폭력과 시민 불복종의 철학을 발전시켜 훗날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주요 활동
- 찰카 운동 (Khadi Movement): 자급자족을 통해 영국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했습니다.
- 소금 행진 (Salt March, 1930): 영국의 소금 세금에 반대하여 240마일을 행진하며 비폭력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 비폭력 불복종 운동 (Non-Cooperation Movement): 영국 정부와의 협력 거부와 비폭력 시위를 통해 독립을 추구했습니다.
-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인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21년 동안 머무르며 인도인과 다른 유색 인종의 권리를 위해 싸웠으며 그의 노력은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에 대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 간디는 인도로 돌아온 후 인도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고 그의 지도력은 인도의 독립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인도의 독립 이후에도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암살과 영향
- 1948년 1월 30일 힌두 극단주의자인 나타람 고드세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 간디의 비폭력 철학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권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넬슨 만델라 등 많은 지도자들이 그의 사상을 따랐습니다.
- 간디는 인도의 국부로서 그의 생애와 비폭력 활동은 인도는 물론 세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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